“더 나쁜 놈들도 잘만 살드만…”
“더 나쁜 놈들도 잘만 살드만…”
  • 김선미
  • 승인 2018.07.2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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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칼럼]어느 정치인의 황망한 죽음과 부끄러움

더 추하고 중한 죄 짓고도 수치심 모르는 뻔뻔함에 질리다

   김선미 편집위원

“죽기는 왜 죽어…어머니도 살아있다면서…더 나쁜 놈들도 잘만 살드만…” 노모의 탄식이었다.

“너무 안 됐어. 죽었으니까 그렇지, 만약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물고 뜯고 난리였겠어”

한낮 무더위가 끈끈이처럼 온몸을 칭칭 감아대던 날, 집근처 작은 밥집 옆 테이블에서 들려온 애잔함이 묻어나는 중년 여성의 말소리였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정현종 시 <방문객> 중-이라는데 어마어마하게 왔던 한 사람의 일생이 참으로 허망하게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죽음, 세상에 황망하고 애달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마는 ‘노회찬 의원 투신 사망’은 황망하다 못해 황당했다. 처음에는 가짜 뉴스인줄 알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지만 동기가 건넨 그 ‘호의(?)’ 혹은 ‘보험’은 평생을 진보의 아이콘, 노동자와 약자의 대변인으로 살아온 그를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등 떠밀었다. 그도 피해가지 못한 정치자금의 덫에 걸린 것이다.

진보의 아이콘, 노동자 대변인도 피해가지 못한 정치자금 덫

한편에서는 진보의 이중성이라며 비아냥거리는 거리기도 했으나 더 많은 사람들이 뜻밖에도 그의 때 이른 황망한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기간 내내 여야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의 조문은 물론 일반인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수만 명이 장례식장을 찾아 눈물을 훔치며 지켜주지 못함을 미안해했다.

그와의 특별한 인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이 불가마 더위 속에 빈소를 찾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게 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정치인이라는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비극적 선택을 접했을 때 맨 먼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한” 윤동주의 <서시>가 떠오른 것도 그러한 이유다.

공개된 유서에서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고 밝혔다.

이중성 비아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염 속 끝없는 조문행렬

누군가는 세상이 그의 죽음을 너무 미화한다고 불편해 한다. 수천만 원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호의의 선을 넘는 액수이고 본인도 받았다고 시인한 마당에 그 부분을 간과하는 것 같다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아는 정치인이었다.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에 눈 감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극단적 선택을 더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더 많은 부정한 돈을 받고도 수치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정치인들의 얼굴 두껍고 뱃속 검은 뻔뻔함에 질렸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후안무치는 갑질의 일상화만큼이나 일상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짓기는 커녕 입만 열면 변명과 막말, 남 탓으로 일관하는 모습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런 정치계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진’ 정치인이 얼마나 될까. 천연기념물만큼 찾기 어려운 것이 우리 현실이다.

부끄러움과 염치가 실종된 시대, 부끄러움에 대한 메시지

   <사진 : 정의당 홈페이지>

극단적인 죽음의 형태가 미화 되서는 안 되지만 그의 죽음에 담긴 뜻만큼은 우리사회가 곱씹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부끄러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사회는 언젠가부터 제 잇속 앞에서는 부끄러움과 염치를 잊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끄러움을 가르쳐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건강한 상식과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저절로 습득되는 부끄러움과 염치마저도 학습시켜야 될 만큼 부끄러움과 염치가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의 단편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가 떠오른다. 오래전 읽었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물질주의에 매몰된 서울이라는 속물적 공간에서 펼쳐지는 위선과 가식을 그려내고 있는데 내용보다도 제목이 주는 메시지가 더 강렬하게 기억된다.

노회찬 의원의 비극은 남들에게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뻔뻔함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다. 끝없는 조문행렬은 더 큰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희희낙락 잘살고 있는 뻔뻔함에 대한 평범한 이들의 분노이고 눈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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